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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세계도시여행지100선

50위 더블린

by nhd 202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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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 50위 더블린

국가 : 아일랜드

관광객수 : 521만명

언제부터 더블린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대체로 아일랜드의 선주민인 켈트인들이 천년 전부터 살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지에 에브라나라고 언급된 곳이 더블린일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더블린은 아일랜드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곳이기도 하다. 450년경에 성 파트리치오에 의해 더블린 사람들은 기독교로 개종했고, 이후 독특한 켈트-기독교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9세기, 바이킹이 리피강을 거슬러 더블린으로 쳐들어와 켈트인들의 마을을 불태우고 새로 성을 쌓았는데 그때부터 더블린이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더블린이라는 말의 어원은 "검은 물웅덩이"를 의미하는 둘린(Dubhlinn)에서 왔다는게 거의 정설이다. 당시에 마을 안쪽으로 물길이 나있어 선박을 놓던 웅덩이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흔적은 지금도 더블린 성 뒷편에 남아있다. 바이킹이 점령한 후 더블린은 일대 무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크게 번성한다.

이후 켈트인과 바이킹은 더블린을 놓고 300년 넘게 혈투를 벌이다가 1171년, 잉글랜드의 앵글로 노르만인들에 의해 완전히 추방되었다. 이듬해인 1172년, 잉글랜드의 헨리 2세는 더블린에 성을 짓고 잉글랜드 브리스톨의 속령으로 삼아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더블린은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 중심지가 되었다.

1534년, 아일랜드 사람인 피츠제럴드가 반란을 일으켜 더블린을 점령하면서 한때 아일랜드 섬은 독립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8세는 결국 아일랜드를 다시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아일랜드 왕국을 세웠다. 영국 내전으로 다시 더블린이 독립세력에 점령되기도 했지만 올리버 크롬웰은 독립을 용납하지 않고 아일랜드 섬으로 쳐들어가 더블린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다. 이후 여러 차례 아일랜드의 독립투사들이 잉글랜드에 맞서는 봉기를 일으켰고, 더블린은 늘 유혈의 장소가 되어야 했다.

결국 1922년 영국은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아일랜드를 자치령으로 지정해 아일랜드 자유국이 출범하고 더블린은 아일랜드 자유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분리 문제와 영국 국왕에 대한 아일랜드 의원들의 충성 서약 등 조약 내용이 문제가 되어 조약 찬성파와 조약 반대파로 나뉘어 1922년에서 1923년까지 약 1년간 아일랜드 내전이 발발하는데, 이때 더블린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져 약 400~500명 가량의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또 이때 아일랜드 대법원인 포 코트(Four courts)의 공문서 자료실이 포격으로 파괴되어 약 1000년간 기록된 아일랜드의 공문서가 소실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이런 불행을 딛고 1937년 아일랜드는 완전한 독립국가를 수립했으며,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수도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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